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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가 선교에 매달리는 근본 이유

true light 2007. 8. 30. 22:57

<서울 신문>의 보도 내용을 참조해서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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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970∼80년대 전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을 만큼 폭발적인 교회성장을 일군 한국 개신교는 세계 기독교계로부터 ‘이해할 수 없는 나라’로 인식된다.

한국교회는 신자 수와 헌금액 같은 외형적 규모가 ‘좋은 교회’‘나쁜 교회’의 일차적인 척도가 되고 있다.

한국 개신교가 해외선교에 목을 매는 것은 바로 이 성장주의와 실적주의의 함정에 빠진 탓이 크다.

 

●90년대 교세 위축… 해외선교 돌파구로

70∼80년대와는 달리 90년대 들어 개신교가 숫적인 성장의 포화상태에 이른 상황에서 당연히 나라 밖으로 눈을 돌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한국 교회의 숫자치중적인 조직 메커니즘 차원에서 계속 성장을 하지 않으면 안되는 태생적인 속성상 90년대 이후 교세가 위축되면서 위기의식을 느꼈고 그 돌파구를 해외에서 찾았다고 할 수 있다.

교세가 늘면서 몸집을 키워온 교회들의 예산은 매년 늘어나는 데 비해 성장 위축으로 적자가 쌓이면서 해외선교에 힘을 쏟게 되는 것이다.

교회가 계속 성장할 것이란 장밋빛 기대에 부풀어 각 교단이 앞다투어 늘려 왔던 신학자의 공급과잉도 해외선교의 큰 이유.

가장 큰 교단인 장로교단(통합)만 하더라도 지난 10년간 교회와 교인 수가 각각 23%,15% 증가한데 비해 목사 수는 63%나 늘어났다.

해마다 300명의 잉여 목회자가 배출되고 있는 셈이다.

지난해 졸업생의 45%만이 전임전도사로 진출한 것을 보면 절반도 안되는 인원만 임지를 찾아가는 실정이다.

 

성장주의에 익숙한 교회들의 내적인  동력이 약해진 상황에서 극심한 취업난에 허덕이는 잉여 목회자들을 사역시키기 위해교회들이 선교 불모지대인 위험지역에 더 눈독을 들일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

실제로 교계에서는 위험한 곳에 얼마나 더 많은 선교사를 파견했는지를 ‘독실한 신앙심’의 척도로 여긴다.

공격적 선교에 치중하는 복음주의 교회들일수록 위험지역과 오지에 더 많은 선교사를 보내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벌인다.

수천명이 사는 외딴 작은 마을에 한국인 선교사 수십명이 몰려드는 경우도 생긴다.

 

●위험지 파송 선교사 수가 교회 세 좌우

위험지역에 파송되는 선교사들이 차세대 리더로 부상하고 있는 점도 눈여겨볼 대목.

분쟁지역과 이슬람권 등 위험지역에서 선교를 이끄는 목회자가 귀국후 차세대 지도자로 주목받아 부상하는데 “정치인들의 경력 쌓기와 아주 유사하다.”고 교계의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따라서 위험지역 선교를 개인적인 지명도 향상의 수단으로 삼는 젊은 목회자들은 이들 지역 파송을 주저하지 않는다.

위험지역에서 선교경력을 쌓은, 인기있는 젊은 목회자들을 따라 교인들이 많이 몰려들고 당연히 교인들의 교회에 대한 충성도와 헌금 액수도 높아진다.

위험지역에 많은 선교사를 보내는 교회일수록 높은 평가를 받을 수밖에 없고 심지어는 위험지역에 파송되는 선교사 수가 교회의 세와 인기도를 평가하는 기준이 되고 만 것이다.

 

교회들은 인기있는 차세대 리더들을 보고 몰려드는 젊은 신자들이 늘어나면서 교회의 노령화 극복이란 이득도 얻고 있다.

 

이러한 한국교회의 악순환들이 과연 성경적이라고 볼 수 있을까요? 일은 본질적인 동기가 바르게 시작되어야 하는데, 이런 세속적인 동기속에 하나님의 일을 빙자한다면 그것은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고려가 망한 큰 원인은 스님들에 대한 대우때문에 너도 나도 스님이 되려고 하여, 불교의 부패를 가속화시켰기 때문입니다. 지금의 한국기독교의 모습이 그와 유사하다면 지나치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한국교회는 영적인 위기의 원인을 근본에서 치유할 생각을 하지 않고, 그것은 놔둔채 밖에서 돌파구를 찾고, 일에 대한 실적에서 찾으려 했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오늘의 수치스런 상황까지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한국교회의 바로 선 평신도들이 많이 필요할 때입니다.